‘원래 아침은 안 먹는다’는 낯부끄러운 대사는 잊자. 
공감성 수치에 몸서리치며 외면하기에, 이 영화가 가진 무게감이 너무 크다. 탈정치의 낭만을 부르짖는 대사들은, 오늘의 민주주의에 뭐라고 대답할까. 
대동은 범동으로, ‘같다’는 호소는 ‘하나’라는 단언으로 변해버렸다. 정여립은 “임금이나 노비나 대동하다”고 주장했지만, 범동계는 “온 세상 사람이 다 하나”라면서 “대장이 따로 있을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 
정여립은, 양반이든, 노비든 천하를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범동계는 소유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 ‘하나’이면 족할 뿐이다.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는, 그것이 “필요”한지 나중에 고민할 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주권의 문제는 탈-주권의 정치학으로 달음박질한다. ‘모두가 하나’라는 선언 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멋쟁이들에게, 사랑에 미친 반란 수괴는 어떻게 보였을까. 반란 수괴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우리는 어떻게 비춰질까. 주권은 소유권과 불가분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개인의 소유권은 무언가를 가질 수 있다는 권리 개념 위에 성립한다. 그리고 그 권리를 옹위하기 위해서는 주권 또한 소유해야 한다. 무언가를 가질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주인이어야 한다. 그렇게 소유권과 주권은 나란히 선다. 그래서 ‘주권’은 일상이 된다.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동시에 주권에 권리와 의무가 병립하듯이, 소유권에는 권리능력과 책임능력이 병립한다. 의무 없는 권리는 없고, 책임능력 없는 권리능력은 없다. 내가 가진 권리로 발생한 문제에 책임질 수 없다면 소유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행사한 권리에 따르는 의무를 외면하면 주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탈-주권의 정치학은 이 오묘한 긴장을 비껴간다.
책임능력과 의무, 권리능력과 권리는 오로지 주권이, 소유권이 문제가 될 때만 문제가 된다. 그래서 가장 쉬운 해법을 찾는다. 주권으로부터의 탈주다. 주권과 소유권을 거부하는 ‘쿨함’만 있다면 인간의 해방은 비로소 찾아든다고 설득한다. 
범동의 행보는 이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따른다. 범동은 충청감사를 쳐죽인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필요없다며 ‘쿨’하게 떠난다. 그의 행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탈주권의 정치학을 따른다. 그리고 여기에 탈주권의 정치학이 가진 자기모순이 폭로된다. 
범동의 행위는 여지없이 주권자의 행보다. 조선의 백성으로서, 일본인이 되기를 선택한 관료를 때려 죽였다. 조선의 주권자로서 이를 침해한 관료를 망설임 없이 때려 죽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부상할 의무의 문제, 책임의 문제는 없다. 모두가 하나라는 선언으로, 대장은 필요없다는 쿨함으로 중무장한 채 어디론가 떠난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범동에게, 이렇게 ‘해방’이 찾아들었다. 
오늘의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만연한 ‘쿨함’에 묻는다. 권리능력을 행사하지 않을테니 책임능력을 묻지 말라는 우리에게,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테니 의무를 지우지 말라는 우리에게. 정치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쿨함을 향유해 온 우리에게 묻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쿨하게 떠난 정치의 자리에 무엇을 채워 넣으면 되냐고 말이다.

글쓴이 | 윤 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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